북한의 노동당 규약과 북한형법에 대한 개폐가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정책의 추진을 가로막고 있는 정부 관련부처 내 반통일적이고 반개혁적인 관리들에 대한 청산과 우리 사회 내 수구기득권세력에 대한 청산이 필요하다. 또한 끊임없이 메커니즘적 여론을 조정하고 냉전논리와 반
나와 같이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기를 어렴풋이 바라고는 있으나 그로 인한 손해를 감내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민족이라면 통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내가 보기엔 다소 병적이라고 느껴지는 다혈질의 국민들도 있음을 나는 감안한다. 그러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극히 적다.
회담을 가졌다. 남과 북의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5개 조항의 “6.15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첫째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북한의 명백한 도발로 전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꼭 단순하게 그것만이 원인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며 때문에 우리 조는 한국 전쟁에 관련하여 국내적, 국제적인 상황과 더불어 남북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Ⅰ.한국 전쟁의 배경과
북한의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선의의 동반자’로 간주하고, 남과 북이 함께 번영을 이룩하는 민족공동체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것이었다. 1989년 9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은 국회연설을 통해 통일 과도단계인 ‘남북 연합’을 중심으로 하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였다. 또한 1990
남북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 협의회를 열어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 해 8월 15일 38선 이남에는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 38선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한국의 분단을 현실이 되었다.
2. 분단한국과 이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입장
1) 미국
미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났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한국전쟁은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 북한에서는 ‘민족해방전쟁’, 중국에서는 ‘항미원조’ ‘미 제국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유엔이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였으나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
통일은 통일의 열망이 훨씬 강한 한국민들에게 기대와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990년 10월 통독이 되던 시기에 남북 고위급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남북 합의서’가 채택되면서 남과 북의 통일은 점점 더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94년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과 북한의 김
남북한이 성립되며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되었다. 남북한의 정치지도자 모두 통일만이 민족의 유일한 활로라고 믿었지만 모두 자신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양측은 이를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한다는 신념을 강하게 가졌다. 다시 말해 남북한은 서로 자기 쪽의 체제를 상대